라면 끓이기는 드디어 도달한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일".
자신의 길을 모색한 20~30대
제가 라면 업계에 들어왔을 땐 40살이었습니다.꽤 늦게 핀 편인데 그때까지 다양한 일을 경험해 왔습니다.처음 2년간은 대학 시절에 동창들과 창업한 화장품 판매회사였습니다.그 후, 회사의 업적이 떨어져서 그만두고 나서는 의류 회사로 옮기면서 상품 기획부터 보석이나 포목 판매, 신규 출점 사업까지 폭넓은 일에 종사했습니다.그 당시는 저는 창사 영업부장으로 사내외에서도 유명한 인물로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위세가 좋았던 시절이었던 그때는 돌체 앤 가바나 같은 명품 브랜드의 양복을 입고 어깨로 바람을 가르며 걷고 있었지요.
다만 실은 저는 대학 시절부터 투자 컨설턴트가 되는 꿈이 있어서 35살 때 회사를 구만두고나서는 드디오 개인 사무실을 창업했습니다.정말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되어서 처음에는 정말 기뻤어요.매일 아침 9시에 도쿄 증권거래소가 열리고 15시에 닫힐 때까지 PC 앞에 붙어서 주식 매매를 하면서 그 모습을 회원 게시판을 통해 실시간 중계를 했습니다.긓리고 거리 소가 종료한 후에는 그날의 매매 분석을 블로그에 자세히 기록하고 올렸습니다.글을 올리고 나서는 다음는 뉴욕 증권거래소를 보고 지수 움직임을 확인하고 도쿄 증권거래소에 미치는 영향을 예상하다가 다시 9시부터 도쿄 증권거래소에 갔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마음이 쉴지가 앉습니다.그러다 보니 자기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모르게 됐다가 주식 매매에 관심도 없어졌습니다.그러니 2008년 리먼 쇼크로 주식이 대폭락했을 때는 저는 솔직히 안심했던 거 같아요.큰 손해를 야기했지만 이제 그런 것보다 '아, 이제야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라는 해방감이 더 강했죠.
특농 국물이 인생의 나침반에 된다
하지만 저는 일자리를 잃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한때는 억대의 큰돈을 벌었는데 이제야 작은 돈만 남았을 뿐이다.허무감에 시달리고 아무것도 할 기력이 없고 1년이나 지날 무렵이면 재산도 바닥났어 '언제 죽어도 된다'라고는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그런데도 문득 '無砲(무텟포우)' 라면이 생각이 났거든요.일 년 동안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왔지만 '무텟포우' 라면만큼은 이틀째 비우지 않고 먹으러 갔답니다.그런데 저는 가게에 가서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의 한 그릇을 찾는 여행'이라 제목으로 '무텟포우' 전용 정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오늘의 국물은 감칠맛이 깊이가 있었다.' '돈코츠의 풍미가 더 강해졌다'고 매번 자세한 소감을 올리기나 했습니다.
국물 맛이 꼬들꼬들한데 단순히 진한 맛이 아니라 돼지의 파워가 폭발한 듯 톡 쏘는 뒷맛….“무텟포우” 의 국물이 떠올려서 “죽기 전에 다시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그 진한 돈코츠 국물을 내가 직접 만들고 싶다! 냄비 한 그릇에 가득한 국물을 저어 보고 싶다!” 는 마음이 생겨 안절부절못하면서 “지금 곧 먹으러 가야지!” 바로 가게로 향했습니다.
망설임이 자각으로 바뀌고 자각이 확신으로 바뀌다
라면집에 도착해서 평소대로 대장님이 끓인 라면을 먹었더니 이제 국물이 다른 데 라면이랑 완전히 다르더라고요.라면집에 도착해서 평소대로 대장님이 끓인 라면을 먹었더니 이제 국물이 다른 데 라면이랑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제가 초등학교 때 할머니께서 엔카(일본식 트로트) 가수 디너쇼에 데려가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그때 손님들이 감동하고 눈물 흘리면서 노래를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내 마음에 “사람을 감동해 주고 돈을 받을 수 있다니 멋진 일이구나!”라고 생각 난 적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자기가 어른이 되면 실세 사회생활에 나가면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이고 돈을 벌리는 사람도 있고 허울 좋은 말으로는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답니다.그동안 다양한 일을 해왔지만, 항상 ' 저는 그 가수와는 다른 길로 와버렸구나…'라며 민망함을 느꼈지요.그만큼 이때 “무텟포우”가게의 라면이 어렸을 때 봤던 가수의 모습과 딱 맞았습니다.저에게 라면집이야말로 사람을 감동할 만한 일이야! 라고.집에 돌아온 나는, 마음의 전부를 편지로 써서 이력서와 함께 「무텟포우」의 아카사코 대장에게 보냈습니다.
악착같이 몸부림쳤던 수행 기간
편지를 읽은 아카사코 대장암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셔서 바로 나라현에 있는 “무텟포우”라면 의 계열 점보인 '돼지 뼈'(라면 가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역시 라면 가게에서의 수행은 어렵고 상상하는 이상 힘든 나날이었습니다.아침 6시쯤부터 시작해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당시 오사카에 있던 집에서 나라에 있는 가게까지 왕복 약 4시간이나 걸리고, 그중에 약 1시간 반은 도보였습니다.수면시간이 젊은 데다가 오가는 길에 체력을 빼앗겨서 열이 담긴 주방 작업은 저에게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제가 맡길 수 있는 일은 설거지 같은 일밖에 없었습니다.의류업계 시대의 동료가 저를 응원할 겸 먹으러 와 줬었는데 왠지 한심해서요.이전에는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명품 브랜드의 양복을 늘 입고 왔었는데 이제야 시급 850엔짜리 라면집 수습생입니다.저는 뭘 하고 있겠냐고 생각 난 적도 있었어요.저의 며느리와 주변 사람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만큼 쉽게 그만두겠다는 말이 못했습니다.“재빨리 내가 직접 돈코츠 국물을 끓이는 거야!” 라는 집념 같은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국물을 맡기려면 아카사코 대장님께 인정받고 여러 명의 형 제자들을 앞질러야 한다는 겁니다.그래서 매일 매일 일을 굉장히 열심히 했죠.어떤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정성껏 열심히 하고, 무침을 먹을 때도 절대로 작업을 멈추지 않도록.아키야,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제발 쉬어줘'라고 대장님이 말을 건너 줘도 저는 일부러 모두가 잘 보이는 장소에서 청소하거나 팔굽혀펴기하거나 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이런 생각도 들겠죠? 왜냐면 저는 빨리 국물을 끓이고 싶어서 그래요.자기가 요렇게 완전히 진심이라는 걸 맹렬히 어필해야 하니까요.
라면 인생의 초석이 되는 '무텟포우' 아카사코 대장의 가르침
이러한 노력 덕분에 시작한 지 4개월 반 만에 “무텟포우”계열 점보인 '쓰케멘 무심'의 국물을 맡길 수 있었고, 1년이 지날 때쯤에는 이례적으로 확약해서 계열 점보인 “가무샤라” 점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맹활약 끝에 겨우 염원하던 국물 끓이기에 도달했습니다만 기쁜 마음이 있는 가운데, 그 당시는 아직 라면을 끓이는 데만 열심히 노력했습니다.국물을 섞는 일은 상상하는 것보다 중노동이고 레시피대로 만들 수는 있지만 아직 좀처럼 자기가 의도하는 맛을 조절할 수 없었습니다.점점 심오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무텟포우” 아카사코 대장님한떼 많이 들은 말은 “손님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정직하라”라는 말입니다.만약 만족스러운 국물 맛이 나오지 않으면 솔직하게 사과하면 된다. 정말 맛있게 내놓고 손님을 속이면 그건 거짓말이 된다고.그렇게 한다면 신뢰를 잃고 가게는 끝나 버린답니다.중요한 것은, 자기가 “맛있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손님이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라면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카사코 대장님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우리의 레시피는 손님들이 다 먹은 덮밥 속에 있다.” 손님들이 국물을 왜 남겼을까? 만드는 단계에서는 어떤 원인이 있었을까? 아무리 줄을 서는 큰 가게가 된다고 해도 우쭐하면 안된다.손님들의 의견을 잘 듣고 거짓말 없는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아카사코 대장님의 말은 “무텟포우” 그룹에서 일을 했던 9년간은 물론 지금도 저의 라면 인생의 초석이 되어 있습니다.
신천지 아마가사키의 만남과 결의
신천지 아마가사키의 만남과 결의.아마가사키 땅에 가게를 차리게 된 것은 정말 좋은 인연의 축적 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아마가사키 땅에 가게를 차리게 된 것은 정말 좋은 인연의 축적 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하나님께 손을 모아서 “맛있는 라면을 끓이고 먹어주시는 손님과 주변 지역 사람들이 꼭 좋아하실 가게로 만들겠습니다.절대 사리사욕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가게를 열리기 위해 사람의 인연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아마가사키 시내의 음식점에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려서 다음 날 그걸 받으러 나가게 되었습니다.“평소에는 절대로 떨어뜨리는 일이 없는데 이상하구나”이라고, 생각하면서 걸고 있다 보니 거리의 있는 부동산 중개업소가 눈에 띄어서 방문해 지금의 집을 소개 받았습니다.“평소에는 절대로 떨어뜨리는 일이 없는데 이상하구나”이라고, 생각하면서 걸고 있다 보니 거리의 있는 부동산 중개업소가 눈에 띄어서 방문해 지금의 집을 소개 받았습니다.“평소에는 절대로 떨어뜨리는 일이 없는데 이상하구나”이라고, 생각하면서 걸고 있다 보니 거리의 있는 부동산 중개업소가 눈에 띄어서 방문해 지금의 집을 소개 받았습니다.
또 금융기관 대출을 받을 때도 면담 당일은 날씨 안 좋아서 갑작스럽게 담당자가 바꿨는데 그 대리로 오신 담당자는 제가 점장으로 일했었던 '가무샤라' 라면집의 광팬이었거든요.“꼭 새로운 가게도 응원하겠습니다”라고 매우 친절하게 대응해 주셨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다양한 분들의 사업을 보았는데요, 인간은 ' 어떤 일이 있다고 해내는 거야!' 라도 베풀란다면 스스로 사람의 인연과 문건, 돈도 마련된 겁니다.저는 젊었을 때부터 다양한 분들의 사업을 보았는데요, 인간은 ' 어떤 일이 있다고 해내는 거야!' 라도 베풀란다면 스스로 사람의 인연과 문건, 돈도 마련된 겁니다.저는 젊었을 때부터 다양한 분들의 사업을 보았는데요, 인간은 ' 어떤 일이 있다고 해내는 거야!' 라도 베풀란다면 스스로 사람의 인연과 문건, 돈도 마련된 겁니다.
라면은 나와 사회를 연결하는 접점이다
가게를 열린 후, 정말 많은 손님이 방문해 주셔서 최근에는 잡지나 입소문 사이트에서도 평가받을 기회가 늘었습니다.가게를 열린 후, 정말 많은 손님이 방문해 주셔서 최근에는 잡지나 입소문 사이트에서도 평가받을 기회가 늘었습니다.가게를 열린 후, 정말 많은 손님이 방문해 주셔서 최근에는 잡지나 입소문 사이트에서도 평가받을 기회가 늘었습니다.제가 소중한 기준은 '손님을 사랑하는 것', '소재를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라면을 즐기는 자세',이 세 가지입니다.손님 한명 한명에게 정성껏 라면을 제공하고 맛있는 국물을 만들어 준 소재에 감사한다.그리고 매일 라면에 종사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긴다.이 3가지만 지키면 무조건 맛있는 라면을 끓일 수 있고 제 심지가 흔들리는 일도 없습니다.
열심히 라면을 끓이는 것은 돈벌이나 명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손님을 감동하게 하기 위해서이다.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지만 라면을 먹고 인생이 조금이라도 밝아지면 제의 가게에서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조금 밝아지겠죠?
라면을 끓이는 것은 저에게는 사회공헌입니다.사회를 위해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고, 사회에서는 저의 존재 의의입니다.